죽전의 군량뜰에 세워진 아트홀이 포은 아트홀로 명명되고 있는 이유는? 손남호 2012-07-24 08:45 가 본문내용 확대/축소 본문 용인지역의 지명에 대하여 모신문사의 편집인이 책을 펴낸적이 있다. 저자는 이렇게 설명을 하고 있다. 마을은 인위적으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며, 그렇다고 행정적 편의를 위하여 짜여진 조직도 아니다. 그저 사람들이 모여 삶의 터전을 일구는 자연의 공간이라고 지적하고 있어 많은 사람들의 공감을 받은바 있다. 용인시민신문의 우상표편집인의 용인자연마을 기행 1. 2 특히나 전통사회에서는 공동체의 가장 기초단위인 가족이라는 혈연관계를 벗어나 처음 속하는 곳이고, 인간들이 함께 어우러져 살아가는 기초 공동체라고 기술을 하고 있다, 이 지역공동체의 군상들이 통제의 수단으로 이름 지어진 것이 아닌 구성원들이 스스로 직접참여하여 만들어진 지명이다. 죽전동 1003번지일대(군량뜰)에 하수종말처리장이 들어서면서 주변이 많이 변하고 있는데 하수처리장상부에 아트홀을 건립하고 그 이름을 포은 아트홀로 명명을 하였다고 하여 말들이 많다 주변의 포은 정몽주 묘가 있어 그 정신을 이어간다는 취지하에 모현면에 있는 포은의 묘를 빗대어 죽전에 위치한 아트홀 이름을 포은이라고 했다고 하니 참으로 답답하다. 자연마을 기행을 집필한 우상표씨는 자연마을 기행에서 죽전의 대지마을을 이렇게 기술하고 있다. 고려시대에 어씨가 살았는데. 풍수지리상 큰 연못을 파야 잘살수 있다는 설에 대지(大地)라는 지명을 븥였다고 전해지며, 죽전(竹田)은 “대나무 밭” 이라는 이름으로 마을사람들이 소리내어 읽다보니 대지가 되었다는 설도 있다고 기술하고 있다. 하지만 그마을의 집성촌이었던 경주김씨 집안에서 선대의 묘소가 천하의 명당이라고 하여 대지라는 지명이 생겼다는등 여러설이 있지만 그 진위를 가리기에는 아직 향토사학자들의 고증이 부족한것 같아 후세와 현재의 사학자들이 좀더많은 자료를 찾아 우리후손이 제대로 알수 있게 만들기를 바랄뿐이다. 심지어 그 많은 선조들이 살다간 죽전 군량뜰에는 현재 하수처리장이 들어서있지만 대지가 기름지지는 않았지만 대지가 넓어 군량을 조달하여 쌓아둘 정도의 넓은 들에서는 주민들이 고쌈놀이를 할정도의 부지로써 수원과 성남, 그리고 용인의 남사일대의 곡창지대의 사람들이 모여 행사를 하였다는 설이 있다. 그렇다면 현재 죽전에서는 고쌈놀이를 재현하고자 하는 원주민들이 각종 고증자료를 찾고 있는데 군량뜰에 세워진 아트홀의 명명이 왜 포은으로 했는지 의아스럽다는 지적이고 몇백년 내려오던 향토적 지명을 잊혀지지 않게 보존하는것도 우리후손들이 해야 할 일인데 과연 수만명이 살고 있는 죽전의 사람들이 군량뜰이라는 지명을 알기나 할까 의아스럽다. 왜 포은이란 이름이 용인을 뒤덮어버리는것일까? 고려의 충신이라는 정몽주의 시신은 개성 풍덕에 가매장됐던 것을 조선 개국 뒤 태종 이방원이 왕위에 오른 뒤에야 신원된다. 바로 정몽주를 죽인 이방원이 그렇게 한 것이다. 그제야 떳떳이 고향 영천으로 이장한다고 유해를 옮기는데 마침 용인 땅을 지나게 되는데 만장이 모현 능골에 떨어져 영천까지 가지 않고 모현에 무덤을 썼다고 한다. 이때부터 인근 지명이 살금살금 정몽주 식으로 바뀌었다. 우상표씨가 적고 있는 자연마을 기행의 문헌을 들여다 보면 풍덕천 - 풍덕은 정몽주 시신이 가매장됐던 개성 인근의 한 지명이다. 원래 풍덕천은 ‘풍덕내’였다. 바로 포은의 장례행렬이 이곳을 거쳐 선영이 있는 경상도 영천으로 가는 길에 ‘풍덕에서 왔다’는 뜻에서 한자의 올 ‘래(來)’자를 써서 ‘풍덕내(來)’라고 불리다가 ‘내’를 ‘시내’로 잘못 해석하여 풍덕천으로 불리게 된것이다. 죽전 -정몽주는 개성 선지교에서 쇠망치로 척살당했는데, 그 자리에 대나무가 솟아났다는 전설(확인 불가)이 생겼다. 선지교도 대나무가 솟아났다고 하여 ‘선죽교’로 바뀌었다. 바로 대나무는 임금에 대한 충성을 상징하며, 포은의 장례 행렬이 이곳을 지났기에 죽전이라는 지명을 갖게 되었던 것이다. 그런 연고로 정몽주의 유해가 이곳을 지나간 뒤 용인 땅 곳곳에 정몽주 관련 지명이 생겨나기 시작했다.(고증이 필요한 점이다) 대지 -시신이 풍덕천에서 모현 쪽으로 지나간 중간 지점인데, ‘포은과 같은 대충신이 지나간 큰 땅’이라는 의미로 큰 대, 땅 지로 지었다. *일설에 큰고개란 의미로 大峙(대치)이던 것이 대지로 변한 것이라고도 한다. 이처럼 죽전일대의 지명이 경주김씨의 집성촌으로 이루어져 있었는데도 어느날부터 정몽주에 의한 전설이 판을 만들고 있지만 근거가 약하다. 모현 - 모현면의 원래 이름은 쇄포면이다. 그런데 포은의 장례 행렬이 이곳을 지나는데 갑자기 명정(죽은 사람의 얼굴을 그린 족자)이 바람에 날아가 현재 묘소의 위치에 떨어져 이곳에 안장하였다고 한다. 그리하여 ‘충성스럽고 현명한 학자를 사모한다’는 뜻의 ‘모현(慕賢)’으로 바뀌게 된 것이라고 하는데 과연 지명에 맞는 말인가? 능원리 - 정몽주의 무덤이 있는 일대를 마치 왕의 무덤이 있는 것처럼 능원리라고 했다. 능은 왕이나 왕비의 묘에 붙이는 명칭인데, 이방원이 눈감아 준 모양이다. 왕을 지키다 죽은 사람이라는 의미로 받들어준 것이다. 이방원 자신이 일개 열혈 청년일 때는 몰랐는데 왕이 되고 보니 왕을 위해 목숨 바칠 영웅이 필요했던 것이다. 능평리 - 정몽주 묘 일대의 땅 중 용인시 관내는 능원리이고, 광주시 관내는 능평리가 된다. 능평리는 능곡리, 창평리, 차곡리의 3개 마을이 합쳐진 곳이다. 능곡리는 상여를 덮은 연이 지금의 묘자리에 떨어졌다 하여 붙여진 골짜기다. 지관이 보니 임금의 능자리로도 손색이 없는 골짜기라고 하여 ‘능곡리’라고 하였던 것이다. 이런 연유로 묘가 왕릉인 것처럼 윤색되었다. 능골 - 능곡리를 능골이라고 부른다. 이 역시 정몽주 묘 근처 마을이라는 의미다. 최근 이름지어진 포은아트홀 - 수지레스피아에 세워진 용인시 문화시설 명칭이다. 주소명칭에 있어 토지지번에서 도로명으로 바꾸어진 이름 포은대로 - 수지에서 모현면에 이르는 도로 명칭. 손남호 기자의 다른기사 보기 목록 댓글목록 이전글 선출직 시의원. 시장 정당공천제 폐지론이 맞다. 대선공약으로 내걸어라 12.08.23 다음글 용인도시공사 , 고민! 부동산버블 전후의 역북도시개발사업부지 골치 12.05.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