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우현 후보 용인인터넷신문 2006-05-23 02:00 가 본문내용 확대/축소 본문 후보님 프로필 ◇생년월일 : 1957년 1월 3일생(만 50세)◇주소 : 기흥구 마북동 삼성래미안1차아파트 107동 1703호◇가족관계 : 배우자 한원미씨 사이에 1남 2녀◇직업 : 용인시의원◇학력 : 국민대학교 경영대학원 수료, 용인대학교 관광학과 3년 재학중◇경력 : ▲제4대 용인시의회 의장 ▲용인시생활체육협의회 회장 ▲열린우리당 지방자치특별위원회 위원 ▲대통령자문 국가균형발전위원회 자문위원 ▲경기도 31개시군의회 의장단 부회장 ▲용인시 장애인연합회 자문위원 ▲용인대 경영대학원 총동문회 부회장 ▲인천경문직업훈련학교 재단이사 ▲용인시축구센터 이사 후보자 개인이력 1.성명: 이 우현2.나이: 50세3.최종학력: 대학3학년재학4.가족관계: 처,1남2녀5.혈액형: AB형 6.가치관형성에 가장 영향을 끼친 책이나 인물: 김구선생7.주량: 맥주2잔8.애창곡: 사랑으로9.살고있는집: 용인시 구성읍 삼성 래미안 아파트10.재산: 약 5억11.타고다니는차: 그랜져XG12.좋아하는 음식: 가리지 않고 무엇이든지 잘먹는편13.기억에 남는 영화: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14.건강관리를 위한 운동: 축구를 비롯한 모든 운동을 좋아함15.취미: 축구,독서 16.자신의 장점과 단점:사람을 많이 만나다보니 부지런한 편이고 솔직하게 행동한다.17.용인시를 한마디로 표현한다면?: 이 세상에서 가장 편안한 안식처18.용인시가 지향해야 할 도시: 더불어 사는 복지의 터전19.존경하는 인물: 허정무 축구감독20.좋아하는 연예인: 배 일집 21.선거 캐치프래이즈:시민이 시장입니다. 용인을 바꾸는 부지런한 일꾼시장22.연애경험: 사랑하는 아내와의 첫사랑23.시장이 되고나서 가장 하고싶은것: 읍.면.동별 생활체육시설 설치 (인조잔듸구장설치 등)24.10년후의 모습:구체적으로 생각하지는 않았지만 체육관련 일에 종사하지 않을까 생각됨 서면 인터뷰 질문 요지 1.이우현 후보가 용인시장으로 출마하게된 동기는? 20만 인구 때 의회에 입문해서 부의장 두 번, 의장을 두 번 했다. 그래서 변화되는 용인을 가장 많이 아는 사람이다. 공백기간이 거의 없었고, 8년 동안 용인이 추진했던 현안, 앞으로 추진할 것에 대해 잘 알고 있다. 또 난개발을 직접 피부로 와서 그것을 해결하기 위해 지금까지 노력해 왔다. 용인의 미래는 CEO 경험과 행정경험, 정치경험을 겸한 사람이 성공할 수 있다. 용인시는 교통문제가 가장 시급한데 지방자치 예산만 갖고는 할 수 없다. 중앙정부의 많은 지원과 중앙정부와 밀접한 관계를 가진 사람만이 용인시장 후보로서 시민들에게 보다 편리한 모든 민원을 확인하는데, 앞으로의 비전, 용인의 발전, 첨단산업, 외자유치, 관광유치 이러한 것을 추진할 수 있는 사람이 내가 적임자라고 생각한다. 2.용인시의회 의장 활동 중 가장 큰 성과가 있다면? 분당선연장건의서. 삼성전자 공장증설규제개선촉구건의서를 채택하여 중앙정부에 강력히 건의하였고 용인외고 지역할당제 30% 이행촉구, 영덕-양재간 고속화도로 조기착공을 건의하여 관철시킨바 있습니다. 특히 성남시의 반대로 해결을 보지 못했던 죽전-구미동간 7Km도로 개통을 위해 삭발,단식투쟁까지 불사하며 해결하여 시민생활과 밀접한 정책들을 시민편에서 냉정히 판단하고 성과를 도출해 내었습니다. 우리시는 교통문제가 가장 시급한데 지방자치예산만 가지고는 할 수 없습니다중앙정부의 많은지원과 중앙정부와 밀접한 관계를 가진 사람만이 용인시장후보로서 시민들에게 보다 편리한 모든민원을 확인하는데 앞으로의비젼,용인시의발전,첨단산업,외자유치 이러한 것을 추진할수 사람이 내가 적임자라 생각한다. 3.본격 선거운동 돌입한 이우현 후보의 각오와 선거전략은? 용인에 대해 누구보다 잘 알고, 가장 젊고, 추진력 강하고, 항상 시민과 함께 했기 때문에 시민의 마음을 누구보다 잘 안다. 또 현 정부와 밀접한 관계에 있는 사람이기 때문에 다른 후보와는 격차가 있다. 이제는 시민들이 현명하고 많은 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시민 편에 서서 시민과 똑같은 마음으로 중앙정부, 경기도, 용인시의 예산이 올바르게 쓰는지, 추진하는 사업, 첨단산업 유치, 관광유치 이런 것은 진짜 뛰어다니면서 할 수 있는 사람이 지금 용인에는 필요하다.시민의 입장에서 부지런히 뛰어 다니는것이 바로 선거전략이다. 4.용인시 변화를 위한 핵심적 공약사항이 있다면? (3가지 정도) * 수지IC개설,분당선 연장구간 추가역사 신설,신분당선 조기 개통으로 교통난 해결- 동탄-양재간 도시고속화도로 조기완공, 신갈우회도로 신설,42번과 45번국도의 확.포장 및 연장공사, 공영버스 노선증설및 증차,도심내부 공영주차장 확충 등은100만 인구를 바라보는 용인시가 시급하게 해결해야 할 과제입니다.이를위해 중앙정부 및 경기도와 협조하여 해결하겠습니다. * 노인,여성,청년을 위한 10만개 일자리 창출 - 남사와 기흥에 첨단산업단지를 조기에 완공하여 첨단 기술 집약적 기간산업을 유치하고 대규모 외자유치와 대기업의 직접 투자를 이끌어 냄으로서 일자리를 창출하고 영세자영업 창업지원시스템을 마련하여 실업문제를 해결하겠습니다. *경안천,오산천,탄천,풍덕천,마북천을 청개천 같은 생태 공원으로 조성하며 권역별 중심지에 근린공원 조성 - 수도권정비계획법 개정 및 송탄 상수원 보호구역을 해제하여 지역간 불균형을 해소하고 적극적인 녹지공간 확보로 시민들이 이용할수있는 근린공원을 권역별 중심지에 조성하겠습니다.5.용인지역은 동서간 격차가 심하다. 이를 해결하기 위한 방안은? 동부권은 기업유치, 관광시설 유치, 체류형 관광지, 경안천을 생태환경 체육공원으로 만들어서 모든 사람들이 와서 가족과 함께 어울릴 수 있는 곳으로 만들고 싶다.” 서부권은 풀어야 할 숙제 중 하나가 교통난과 주차난 해결이다. 용인 교통의 핵심은 용인시민만이 이용하는 도로가 아니다. 교통의 요충지이기 때문에. 그런데 토공이나 주공이나 건교부가 많은 아파트 사업을 용인에서 했다. 몇 조 이상의 이익금을 갖고 전국에다 다른 사업에 투자했다. 그러다보니 교통의 문제점이 생겼다. 이제는 건교부가 책임을 져야 하고, 용인시의 교통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시예산만 갖고는 절대 할 수 없다. 4조 가량의 지하철 문제나 신분당선, 서울-용인 민자고속화 문제, 국토관리청에서 추진하는 도로 문제 등은 정부의 예산이 뒷받침돼야 하고 순번이 앞당겨져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고 있다. 수지, 구성, 기흥의 교통문제를 해소해야 한다. 어떻게 해서든 수지IC를 개설해야 한다. 그것만이 교통을 해소할 수 있다. 그것은 시간이 많이 필요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6.이우현 후보의 정치적 행보를 보면 인맥 쌓기나 조직관리에 치중해 있다는 견해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8년간 의정활동을 하다보니 자연스럽게 많은 사람들을 알게되고친화력이 좋다는 말도 듣게된다.이것이 정치적으로 장점인지 단점인지는 좀더 지켜볼 일이지만정직하게 부지런히 다니다보니 자발적으로 도와주겠다는 지지자들이 많이 생기게되고 혹시 조직관리 하는것이 아닌가하는 오해도 받게된다.항상 시민의 입장에서 생각하고 행동하는 마음을 언젠가는 알아줄 것이라 생각한다. 7.정치적 성향이 불분명하다는 주위의 평가에 대해서 본인의 입장은?나는 초지일관 열린우리당에 봉사해왔다고 생각하며 맥을 같이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용인에서는 초등학교만 졸업하고 인천, 서울에서 사업을 했다. 용인에 온지는 8년 됐다. 태어나서 14년 동안 용인에 살고 고향에 와서 봉사하고 지방의회에 입문한지 8년 됐다. 실질적으로 30년은 밖에서 생활하고 20년만 용인에서 살았다. 학연도 별로 없다. 용인을 사랑하고 열심히 했기 때문에 시민들이 기득권 세력이라고 하는데 이것은 잘못됐다. 하지만 이렇게 생각하는 것에 대해 서울 있다가 고향에 왔는데 시민들이 따뜻하게 맞아주는 것에 대해 감사하게 생각하고 더 열심히 봉사하는 마음으로 일하겠다. 8.용인시 유권자들에게 당부의 말이 있다면? 저는 지난 6년간 지방의회를 통하여 풀뿌리 민주주의를 실천하여 왔다고 자부하면서 새롭고 깨끗한 정치문화를 창조하고 우리 용인시 발전을 한걸음 더 앞당기고자 이번 용인시장 선거에 출사표를 던졌습니다. 제가 그동안 용인시의회 의장직을 수행하면서 용인시와 시민을 위하여 준비하고 추진하여 온 크고 작은 프로젝트들은 이제 저의 마무리 손길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러나 지난 10년간 우리나라 지방자치의 행정은 특정정당에 의해 독점되다시피 한 결과 지방정부는 아직도 각종 비리에서 자유롭지 못한 실정입니다.이제 우리 모두는 오는 5.31선거를 통해 지방자치 10년을 반성하고 상식이 통하는 건강한 지방정부를 만들기 위해 중대한 결정을 해야 할 것입니다.내 고장을 위해 사심 없이 열심히 노력할 인물, 능력과 경륜, 도덕성을 겸비한 진실 된 일꾼이 누구인가 엄정하게 선택해야 합니다. 저는 그동안 내 고장 용인에서 갈고 닦아온 행정력과 균형감각을 바탕으로 우리 市 용인의 균형개발 특히, 난개발로 교통과 환경의 몸살을 앓고 있는 수지와 기흥지역 시민들을 위하여 많은 노력을 경주하고자 합니다. 감사합니다. 자 서 전 (성장과정.에피소드 등) 저는 우리고향 용인이 부자시가 되기를 바랍니다.용인시민이 가장먼저 소득 3만달러에 이르는걸 제눈으로 보고싶습니다. 또한 저는 우리용인이 잘사는 도시,지식문화 도시가 되기를 소원합니다.재능있는 학생이라면 우리용인에서 충분히 교육을 받을수있도록하고,전국 수재들이 질높은 교육을 받기위해 우리 용인에 와서 공부하는날이 어서 오기를 바랍니다.또한 수준높은 예술가.명망있는 작가들이 우리용인의 공기를 마시면서 창작해 주기를 기대합니다.그렇게해서 우리고향 용인이 어딜가도 자랑스러운 지식문화도시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세계적으로도 빛나는 도시가 되었으면 좋겟습니다.용인시민 한분 한분이 못다한 제 꿈을 이루어준다면 저는 기쁠것입니다.그러기위해 전 용인시의 문지기라도 하고 싶은 소망을 가져보면서 제삶의 일부분을 말씀드리겟습니다. 어린시절의추억 나는 용인에서도 동쪽 끄트머리에 있는 원삼면 시골마을에서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났다.그것도 8남매의 중간,이시절 8남매란 뜻은 먹을 입이 여덟 개란 의미로 곧 가난을 상징하는 말이다.6.25전쟁의 후유증이 채 가시지 않은 농촌 들녘은 그야말로 음울한 그림자가 늘 안개처럼 드리워 있었다. 이런마을에서 가난한 농부의 아들 그것도 여덟이나 되는 형제중 하나로 태어났으니 내 인생은 대략 정해진 것이다.꼴 베러 나가고, 밭일을 거들고 , 고픈배를 욺켜쥐고 흰 구름이나 바라보아야 하던 내 인생은 이렇게 시작됐다.이런 이야기를 하면 사실 내 또래의 친구들이나 선배들에게 는 그다지 큰 감동을 주지 못한다. 왜냐하면 그 시절을 살아온 사람들은,특히 농촌 출신들은 누구나 다 그러했으니까.다만 내가 특이한 것은 부모님 소원대로 농사를 짓던가,공부나 열심히 해서 좋은 학교로 진학하면 그만일 텐데 하필 어려서부터 축구를 좋아했다는 게 문제였다.내 모교인 좌항초등학교를 다닐 때까지 나는 세상을 알지 못했다.사암 저수지 일대가 세상의 전부인 줄 알고 살았다.그러다가 6학년이 되어 중학교에 진학하면서 드디어 내게 변화가 찾아오기 시작했다.그 시절에는 중학교도 시험을 치러 입학하는 때였는데,나는 용인 지역 중학교에 진학하기에는 약간 넘치는 실력을 갖고 있었다.그러다 보니 부모님은 욕심을 내어 나를 인천으로 유학을 보냈다.없는 살림에 한 달에 쌀 여섯 말이 드는 하숙생 신분이 된 것이다.여유가 있어 아들을 유학시킨게 아니라 부모님은 순전히 투자 목적으로 날 인천까지 보낸 것이다.아들 하나쯤은 공부를 제대로 시켜 떵떵거리게 살아야 한다는,그래서 집안의 가난을 떨쳐버려야 한다는 원대한 가문의 목표가 있었던 것이다.그러니까 나는 8남매의 대표 선수가 된 것이다 에피소드 어느날인가 화곡동까지장사를 나갔다가 그만 큰일을내고 말았다.동업하던 친구가 트럭을 후진하다그만 차뒤에서 놀고있던 아이를 친 것이다.아이의 비명이들리고 사람들이 우르르몰려들었다.친구는 얼굴이 백짓장처럼 하애지고 조수석에 타고있던 나는 재빨리 뛰어내려 차 뒤편으로 달렷다.아이는 트럭 뒷바퀴에 아랫배가 쓸렷는지 배를 잡고 고통을 호소했다.붉은피가 옷을 물들이고 나서 길바닥에 흘러내리고 있었다.나는 사태가 심각하다는 것을 깨닫고 아이를 서울 큰병원으로 후송시켜야 한다고 판단했다.그런데 가진 돈이 없었다.나는 벌벌떨고있는 친구더러 아이를 안고 있으라고 해놓고 는 무조건 택시를 잡았다.그래놓고 바로 옆에 있던 구멍가게로 뛰어들어가 돈을 빌리려했으나 모른사이에 빌려주지 않아 주인이 머뭇거리는 사이에 가게 금고가 열려있는 것을 보고 5000원짜리를 꺼내들었다.아이를 살려야 한다는 생각에 서슴없이 돌출행동을 했다.나가면서 나중에 트럭이라도 팔아서 갚아드린다고 했다.거기서 사고를 목격한 동네사람이 동행했는데 나는 택시기사를 재촉해 빨리 가자고 했다.차를타고 가는 도중에도 아이는 피를 흘렷다.아이를 안고 있는 손바닥이흥건할 정도 였다.교회도 다니지 않던 내가 아이를 살리기위해서라면 하나님뿐아니라 누구한테라도 기도를 하고 매달리고싶었다.마침내 서울 병원에도착해 진단을 받으니 장파열로 나왔다.쓸개와 간에도 상처가 난 중상이었다.병원에서는 당장 수술해야 한다고 간호사가 동의서를 내밀었었다.나는 내가 얼른앞으로 나가 내가 서명하려했다.그런데 그때까지 목격자로 동행했던 사람이 앞으로 나오며 내가 그 애비요 내가 서명하리라 알고보니 우리를 따라 황급히 택시를 타고 따라온 사고 현장의 목격자가 바로 그아이의 아버지였다.그 역시 하도 놀라서 자신이 아이의 아버지란 사실을 밝힐새가 없었던 것이다.얼마나 놀랐으면 여태 말을 못하고 그렇게 있었는지 안타까웠다그는 그러면서도 사고를 낸 우리가 어떻게 하나 계속 지켜보고 있었던 것이다.수술이 끝날 때까지 난 주먹을 불끈 쥐고 기도를 했다.종교를 가진 게 없으니 어머니가 믿는 하느님에 의지할 수밖에 없었다.여기서 아이가 죽기라도 한다면 재기는 불가능한 것이다.아이가 잘못되기라도 한다면 운전 실수를 한 친구가 감옥에가는 것은 물론이고 나 역시 치명타를 입게 돼 있었다.입이 바짝바짝 타들어가는 듯했다.나만 그런게 아니고 친구도그랬고,아이의 아버지도 그랬다.아이가 마침내 긴 수술 끝에 수술실에서 나와 입원실로 옮겨졌다.의사는 수술 결과가 매우 좋아 아이는 병원에서 치료만 잘 받으면 머지 않아 퇴원할 수 있다고 안심하라고 말해주었다.목숨에도 아무 지장없고,척추라든가 다른 외상도 더 없다고 했다.그제야 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아이의 아버지도 한숨을 돌리더니 딱히 우리더러 욕을 하지도,원망하지도 않으면서 병실을 지켰다.아이가 목숨을 건진 걸 확인한 뒤에 운전을 한 친구는 경찰서로 가 자수했다.이제 친구가 문제였다.어떻게든 피해자 가족과 합의를 해야만 친구가 풀려날 수 있는 상황이었다.그러자면 돈이 필요했다.돈이 있어야 합의를 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나는 돈 5천 원을 들고 사고 현장으로 찾아가 구멍가게 주인에게 빚을 갚고 맡겨두었던 트럭을 찾아다 중고 시장에 내다팔았다.얼마 쓰지 않았다고 백만원을 다 받았다.나는 이 돈 백만원하고,마침 제약회사에 다니는 친구가 있어 어린이 영양제를 한 박스 얻어 들고 아이의 집을 찾아갔다.아이의 부모를 만나자마자 나는 들고간 돈과 영양제를 내놓고 무조건용서를 빌었다.친구가 아직 젊고 내가 아직 젊으니 인생을 다시 출발할 기회를 달라고 호소했다.뜻밖에도 아이의 아버지는 웃으면서 내 손을 잡아주었다."젊은이,정말 고맙소.그날 피가 흥건한 우리 아들을 안고 기도하는 당신을 보고 난 정말 감동했소.난 하도 놀라서 숨을 제대로 쉬지도 못하는데,두 사람은 정말 우리 아들을 살리려고 애썼어요.어쩌면 그렇게 간절한지 아이를 살리려는 마음이 애비인 나보다 더 절절했소.모른 척 도망칠 수도 있었을 텐데 구멍가게에서 돈을 빼앗다시피해서 택시를 타고 일부러 큰 병원까지 가 수술시켜 주는 걸 보고 난 정말 감동했어요.젊은이의 그 애틋한 정성을생각하면 이 돈을 받으면 안돼요.하지만 후유증이 생기면 가난한 살림에 나도 어쩔 수 없으니 일단 받기는 받으리다.그러니 친구 걱정을 말고,내가 다 합의서 써주고 선처를 부탁할 테니 젊은이나 꼭 재기하구려."피해자들은 너무나 흔쾌히 합의서에 서명을 해주고,따로 탄원서까지 내주었다.그런 덕분에 친구는 무사히 경찰서에서 나왔다.난 정말 큰 위기를 겪고나서야 성을 다한다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깨달았다.내가 아이의 부모 입장이 돼도 사고를 낸 사람이 그렇게 애쓴다면 나도 그렇게 할 것 같았다.결국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정성만이 큰일을 해낼 수 있는 밑천이라는 걸 체험한 것이다.장사든 사업이든 그 무엇이든 사람의 마음을 움직여야 하는 것이다.나는 그뒤 사고 현장을 지나게 되면 꼭 그 아이의 집에 들러 후유증은 없는지, 잘 자라고 있는지 묻곤 했다. 아이의 부모하고도 친해져 언제 그런 사고가 있었냐는 듯이 가까워졌다. <살아온 과정> 저는 학창시절 집안 형편이 여의치않아 마음껏 공부를 하지 못했습니다.그래서 뒤늦게 학문을 마치고여러 대학원의 경영학,행정학 등을 부지런히 익혔습니다.그러고도 틈틈이 독서를 하면서 매일같이 쏟아지는 정보에 귀를 기울이고 있습니다.하지만 저는 책을 읽는 것 보다 학교에서 공부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가르침이 바로 우리주변예 계신 사람들 에게 있다는 걸 알았습니다.제가 만나온 분들이야말로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계층을 막론하고,무슨일을하는 분이든 저에게 깨닫음을 주는 분들이라는 걸 경험했습니다.그래서 저는 누군가 일가를 이루신분이 계시다고 하면 염치불구하고 찾아가 인사를 드립니다.이렇게 수많은 분들을 만나며,사람을 사람으로써 단련된다는 귀중한 사실을 깨닫았습니다.저는 앞으로 훌륭한 인물을 한분이라도 더 만나 한가지라도 더 배우고 싶습니다.부족한 저를 위해 힘써주신 시민여러분,선후배 님들께 늘 감사드립니다.이세상 그 누구다 혼자 잘할수 없습니다.누군가의 도움없이 홀로 잘난 인물은 없습니다.만남에서 얻어진 교훈을 오래 기억하여 그 경험과 지혜를 배워,제가 나아가야할 가르침으로 삼고,나침판으로 삼고자 합니다. 1957년 1월 원삼면 사암리 천곡마을 출생1969년 인천으로 유학 축구선수로 활약했으며 해병대에서도 축구선수를 함연세대 행정대학원과 경기대,용인대학교 최고 경영자 과정등을 수료하였으며,용인대학교 관광학과에서 늦깍이 공부를 하고있음.20여년동안 자영업,제조업,도매업,건설업등 다양한 업종에서 CEO로서 경영 노하우를 쌓았으며,서민과 중소기업의 어려움을 체험함.낙향하여 지방의회에 진출,재선을 하는동안 용인시의회 부의장 2번과 시의장 2번을 역임함. 용인인터넷신문 기자의 다른기사 보기 목록 댓글목록 이전글 이정문 성명서 06.05.26 다음글 깨어있는 시민의식 설 곳 없는 불법선거 06.05.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