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양손씨 목사공파 시조 손책 시제, 보성군 노동면 금호리에서 봉향
밀양손씨 최대 계파로 후손들이 전라도에 세가지를 정하고 5만명으로 발전하다
장인자 2025-12-04 18: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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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양손씨 중앙종친회 손남호 회장은 지난 124일 전남 보성군 노동면 금호리소재 이로재에중앙종친회 손정구 감사와 함께 참석하였으며 손중호 목사공파 회장의 집전으로 광리군 배향에 초헌관에 장파 손병희 회장이 맡았으며. 아현관 비금도 회장인 손왕우, 종헌관은 손형우가 맡았다. 목사공 손책 시향에 초헌관은 손옥철 전 목사공파회장이 맡았고 , 삼경공 배향의 초헌관은 제약공파 손한선회장이 초헌관으로 참여하였다.

 

광리군 배향에는 2006년 손형석 중앙종친회 전 회장(작고)이 후손들의 헌성금을 모아 사당을 만들어 공의 업적을 기리기 위하여 영세토록 숭모정신을  기린다는  취지로 사당을 만들어 시제를 지내고 있는데 이번에도 목사공파 소중중 대표 50여명이 참석하여 목사공파 장파회장인 손병희씨가 초헌관을 맡았으며 비금도에 세거지를 두고 있는 손책의 장손인 손왕우 회장이 아헌관을 맡아 집행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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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리군 사당앞에서 밀양손씨 중앙종친회장 손남호 배향전 )

 

손공의 불사이공의 정신으로 이성계의 역성혁명을 반대하다 처형 당하였지만 고려의 충신으로 알려져 있어 공의 업적을 후손들에게 알리는 손책공의 시제를 목사공파 손옥철 전회장이 초헌관을 맡아 봉향하였다. 이곳은 부인인 원주이씨의 묘도 함께하여 함께 제례를 집행하여 원주이씨의 집안을 일으키는 3형제의 훈육을 높이 후세에 알리고저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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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리군의 후손인 고려 말기 손책(孫策)이 조선 개국에 불복하여 처형 당하였는데. ()은 군사공 휘 영()5세손이고 의주목사 휘 귀린(貴麟)의 장자(長子)이고 목사공파의 파조(派祖)이시다. 고려말에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수주목사(현 부천지역)를 지냈다. 손책의 부인 이씨는 남편이 죽음을 당하자 난을 피해 아들 삼형제를 데리고 보성군 노동면 금호리로 내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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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경공 합동제례는 계파의 회장인 손한선회장이 초헌관으로 검경. 유경. 계경 3형제의 공덕을 기리는 시제를 지냈다. 이 자리는 둘째 유경이 어머니 원주이씨와 기거하다 작고하자 혼자 묻혔는데 후손들이 큰아들과 막내아들의 단을 만들어 합동으로 지내자는 취지로 3형제 묘소를 만들어 삼경공 묘소로 명명하여 아버지 제례시 함께 모시고 있다.

 

첫째 아들 손검경(孫儉敬)은 태종(太宗)의 회유를 끝까지 불응해 나주 향리로 추핵을 당하였다. 나주에 거주하면서 장파의 시조가 되어 후손들이 나주 영암, 목포 신안 완도등지에 세거지를 이루고 있다. 둘째 손유경(孫有敬)은 보성에 정착 중파의 시조가 되었다, 셋째 손계경(孫季敬)은 정읍에 정착하여 벼슬을 하지않고 은거하면서 계파의 시조가 되었다.

 

이에 공의 부인 원주 원씨가 차자(次子)유경(有敬)의 적소(謫所)인 전남 보성군 노동면 금호리 대여촌에 정착하여 600년동안 집성촌을 이루어 밀양손씨 최대의 세거지가 되었으며 목사공파의 3개 계파중 중파의 시조가 된다. 의 묘소는 경남 창원 북오동촌이라 구보(舊譜)에 전하며, 전남 보성군 금호리 대여촌에 의 단()과 배위(配位)인 원주이씨(原州李氏) 묘가 있다.

 

셋째 아들 손계경은 어머니 원주이씨와 헤어져 전북 부안에 세거지를 옮겨 정착을 하고 벼슬을 하지 않으면서 후학양성에 주력하여 후손인 손비장과 손상장을 비롯하여 조선조 초기에 벼슬을 하면서 계파의 증흥기를 맞이한다, 이처럼 조선시대에 걸쳐 지속적으로 발전하였으며, 특히 교육과 문학에 많은 기여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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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사공파의 '목사'는 지역의 행정을 담당하던 관직으로, 손책의 후손들은 이 직위를 통해 지역 사회의 발전에 기여했으며. 유교 교육을 중시하여 많은 인재를 배출했다. 이들은 유교적 가치관을 확산시키고, 국가의 발전에 기여했으며. 문학과 학문에서도 두각을 나타내 후손인 손비장은 시와 수필, 역사서 등의 저술을 통해 조선의 문화 발전에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

 

목사공파는 자신의 족보를 통해 역사를 기록하고, 가문의 전통을 이어갔다. 이러한 족보는 후손들에게 중요한 문화유산으로 여겨지고 있다. 후손들은 빛나는 선조들의 업적에 따라서 소문중의 입향조를 두고 효자비, 정려각등을 건축하는 등 기록을 중시하면서 각 세거지에 효자비 정려각,등을 설치하는 등 기록을 후손들에게 물려주는 역할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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