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양손씨 명천공파 당진에서 입향조 손휘 윤생공 시제 배향 불사이군의 정신으로 두문불출하여 절개를 지킨 선조의 얼을 기렸다 손남호 2025-12-04 18:19 가 본문내용 확대/축소 본문 2025년 11월 29일(음 10월 10일) 10시 충남 당진시 고대면 대촌리 선영내 의추재에서 명천공파 손부승회장을 비롯한 종인 60여명이 모여 시제를 모셨다. 위 시제는 명천공파 회장 손부승의 18대 이자 30세 손 휘 윤생공과 배 숙부인 곽씨를 중앙 제단에 신위를, 좌우에 명천공의 父, 祖父(두문동 72인 孝貞), 증조부등 20위의 신위를 모시고 제를 올렸다. 두문동칠십이인(杜門洞七十二人) 또는 두문동칠십이현(杜門洞七十二賢)은 고려 멸망 직후 고려에 충성을 다하고 절개를 지켰다고 전하는 72인의 유신(遺臣)들을 가리킨다. 공자가어와 사기는 공자의 승당제자를 72명으로 언급하고 있다. 동국 18현이 우리나라의 대표적 성리학자들이며, 두문동칠십이현은 근대화 이전 우리나라의 대표적 절개(節槪)와 충(忠)의 표상이었다. 1994년에 설립된 사단법인 고려역사선양회에서는 72현과 관련된 고려조, 조선조의 각종 역사서와 각 가문의 족보와 문집 등을 고증하여 가장 공통된 인물만을 선별하여 고려대전 충신각에는 정몽주(鄭夢周), 조의생(曺義生), 손효정(孫孝貞) 포함한 72현을 배위하여 봉안했다. 손효정은 좌윤의 벼슬을 하였고 항절실 항절반 (34현)에 포함된 인물이다 이들은 끝까지 고려에 충성을 다하고 지조를 지키기 위해 이른바 부조현(不朝峴)이라는 고개에서 조복(朝服)을 벗어던지고 현재 경기도 개풍군 광덕면 광덕산 기슭인 두문동(杜門洞)에 들어와 새 왕조 조선에 출사하지 않았다. 이후 두문동에 표절사(表節祠)를 세워 그들을 모셨고, 후대에 박문수(朴門壽), 민안부(閔安富), 김충한(金沖漢) 등이 추가로 이곳에 배향되었다. 두문동에 관한 기록은 두문동 72현의 한 사람인 성사제의 후손인 성석주(成碩周, 1649~1695)가 그의 조상에 관한 일을 기록한 《두문동실기(杜門洞實記)》가 가문 내에 전해지다 순조 1809년 간행되었고, 고종 때 사헌부 장령 성대진(成大璡)이 두문동실기를 증보한 《두문동실기(병)속록(杜門洞實記(幷)續錄)》이 남아서 전해지고 있다. 당시 많은 선비들이 은거함에 따라 두문동이라는 곳이 나라 안 여러 곳에 남아 있었다. 이 후 집밖에 나가지 않는 것을 일컬어 '두문불출(杜門不出)'이라고 일컫게 되었다. 원래, '두문불출'이란 말은 '문을 닫고 나가지 않는다'는 뜻으로, 사마천의 《사기》 권68 상군열전 '公子虔杜門不出已八年矣'에서 유래된 것으로 여겨진다. 명천공 손윤생은 통정대부 충청관찰사로서 이시애의 난을 당하여 충청도의 수군을 전선에 진격시키려 하였으나 기일을 놓쳐 문책당하였는데 本島水使(본도수사)가 판서 박원형등 윗선에 호소하여 억울함이 해소되었다. 그러나 벼슬을 더 이상 할 의향이 없어 관찰사를 사직하고 관찰사 재직시 당진지역 명천의 맑은 샘물을 보고 감탄하여 낙향하여 후학양성에 노력하였다. 명천공의 후손은 번창하여 충남 당진에 세거지를 두고 발전하였으며 충청 태안 이원면, 예산 신양면, 양주 진접읍, 논산등에 집단 세가를 이루어 살고 있다. 의추재는 명천공의 공덕을 기리기 위햐여 명천공의 11세손 경(璟)이 1847년에 제각을 짓고 1905년 후손 손인식(孫寅植)이 중수하여 이어져 오고 있어 공의 업적을 기리고 후손들에게 알리고 있다. 손남호 기자의 다른기사 보기 목록 댓글목록 이전글 밀양손씨 목사공파 시조 손책 시제, 보성군 노동면 금호리에서 봉향 25.12.04 다음글 2025년 독서대회 시상식 개최 25.12.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