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양손씨 시조 손순 19세손 밀성군 손빈(孫贇) 추향제 (묘 제) 참여하다 고려말 인물 손유호장군의 묘소를 탐방하다 장인자 2025-11-24 20:20 가 본문내용 확대/축소 본문 밀양손씨 중앙종친회(회장 손남호)는 11월 23일 경남 밀양시 초동면 봉황리 산272-1 밀성군 묘소에서 종인들이 참석한 가운데 중앙종친회 임원 15명과 함께 참석하여 밀성군 손비 추향제를 손병기 운영위원장이 집행 하였다. 이날 초헌관 아현관, 종현관을 지명하여 추향제를 거행하였으며, 밀성군(손빈)의 묘소에 관한 숨은 이야기도 종인들에게 전파하였다, 밀성군은 휘는 빈(贇)이요 고려개국공신 삼중대광사도 광리군 휘 긍훈의 의 12세 손이시다. 고려 고종 신해년에 문과 급제하여 원종과 충렬왕 세 조정을 섬겨 청요직을 두루 거쳐 큰 공적을 쌓아 명성이 높았다. 충렬왕 때에 북쪽의 여진족이 변방을 어지럽히니 공께서 병부상서로서 군사를 거느리고 토벌하여 지경밖으로 물리쳤다. 함북 온성에 전승비가 있는데 거기에 정북대장군 손모지비라고 쓰여있다. 개선 후 금자광록대부 정당문학수문전대학사 동수국사 상장군으로서 사도에 승배되고 밀성군에 봉해졌다. 공은 밀양에서 츨생하여 문장이 탁월하고 무략이 뛰어나 정북대장군으로서 여진을 토벌하여 평정하고 이부상서로서 내치에도 큰 공이 있으니 당대에 공훈을 비할 데가 없었다고 한다. 참고로 밀성군 손빈의 묘는 고려 말기의 장례문화를 알수 있는 귀중한 사료로 알려져 있다. 보통 국내의 모든 묘는 원형을 유지하는데 고려 말기에는 정사각형의 묘지를 석축으로 쌓아 향토 사학자들과 고고학자들의 관심 폭발로 밀양시 향토문화재로 등록을 추진하였으나 공의 증손자 손유호장군의 묘소는 일부 훼손되어 지역향토문화재로 지정이 되지 않았다. 그러나 공의 묘는 더욱 학술적 가치는 있으나 후손들이 묘소를 관리하면서 도굴꾼들의 도굴로 묘소의 일부가 훼손되자 이를 보수하면서 현대적인 돌로 석축을 보수하면서 기존의 자연석 돌로 둘레석을 만들고 상석과 비석이 달라지면서 문화재 지정이 반려되면서 종인들의 안타까움이 있지만 석축 일부만 훼손되었으나 원형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어 역사적 가치가 있다. (손유호 장군의 묘) 하지만 밀성군 손빈의 손자인 손유호 묘(密陽 孫攸好 墓)는 대한민국 경상남도 밀양시 초동면 봉황리에 있는, 고려말 인물 손유호의 무덤으로. 2001년 12월 20일 경상남도의 기념물 제237호 선락장군 손유호 묘로 지정되었다가, 2018년 12월 20일 현재의 명칭으로 변경되었다. 고려 말 인물로 손유호의 , 묘 및 상석(床石) 1기, 문인석 2기, 묘비 1기 등이 남아 있다. 손유호는 고려 1372년 출생하였으며 1410년에 종4품 선략장군으로 두모포(豆毛浦)의 관군을 제수받았고, 1419년에는 대마도 정벌에 참가하기도 하였다. 이후 부친의 병환을 돌보기 위해 낙향하였으며, 일흔 일곱인 1448년에 사망하였다. 전체 묘역은 3단으로 구성되어 있다. 상단에는 묘와 상석, 중단의 동·서에는 문인석, 그리고 하단의 동쪽에는 묘비가 배치되어 있다. 묘는 전형적인 조선 초기의 네모난 묘로, 묘의 앞쪽에는 상석이 놓여져 있는데 고석(鼓石)이 분리되지 않고 함께 조각되어 있으며, 고석의 앞쪽 좌우에 귀신의 얼굴이 새겨져 있는 것이 특이하다. 문인석은 좌우로 마주보고 있는 2기가 동일한 형태이며, 일부 마멸되었다. 머리에는 관(冠)을 썼고 손에는 홀(笏)을 들었으며, 옷자락이 표현되어 있다. 묘비는 전면에만 글자가 새겨져 있는데, 손유호의 세계(世系)와 생몰년·행적·자손·글쓴이의 추모 등이 비교적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이 비는 1450년에 세워졌으며, 성균관 사예를 지낸 박욱(朴彧)이 썼다. 전체적으로 양호한 상태로 잘 보존되어 있으며, 조선 초기 묘제 연구에 중요한 학술적 자료로 평가된다. 장인자 기자의 다른기사 보기 목록 댓글목록 이전글 시조 문효공 손순(孫順) 추향제(묘제)에 참여하다 25.11.25 다음글 11월 밀양손씨 중시조 광리군 손긍훈 손대장군 시향제에 참여하다 25.11.24